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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래빗 홀, 르 아브르,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단절의 시대, 소외의 시대

(2012년 1월 12일 작성)

 

단절의 시대, 소외의 시대


래빗 홀(Rabbit Hole, 존 카메론 미첼 감독, 2010)

르 아브르(Le Havre,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2011)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Wish,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1)

  

  

 적어도 단절과 소외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래빗 홀>과 <르 아브르> 그리고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이하 <진짜로>)은 단절과 소외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고 있고 그 것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영혼과 정신에 대한 단절과 소외는 진작(이라 함은 몇 천 년도 더 되었지 아마)부터 유유히 흘러오던 인류의 아픔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꺼려하기에(혹은 두려워하기에) 단절과 소외라는 영혼의 결핍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외면하려하는 인지부조화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조금씩 변하고 있다. 단절과 소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 결정적 역할은 아마도 2008년 시작된 미국 발 경제위기로 인한 세계 경제 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교롭게도 그 이 후 시리아, 튀니지 등에서의 아랍 민주화 운동과 자본주의의 선봉 미국에서 월가 점령 운동(Occupy Wall Street)이 이어졌다. 도대체 왜 경제 위기 이 후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을까? 생각건대 물리적 박탈감으로 인한 소외 그리고 단절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앞서 말했듯이 소외와 단절은 저주받은 인류의 시작과 그 궤를 함께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신경 쓰기 두려워한다. 눈 앞 물리적 쾌락에 집착한다. 그 물리적 쾌락을 쫒고 쫒다가 어느 순간 그 것은 닿을 수 없는 벽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물리적 소외와 단절이 정신적 소외와 단절로 이어지게 된다. 마르크스의 유령은 이렇게 다시 2000년대 우리의 삶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세 편의 영화는 같은 듯 보이지만 또 많이 다르다. 세 편 중 가장 현실적인 영화인 <래빗 홀>은 자식을 잃은 부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부부의 이야기지만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게 전개된다. 둘이 함께 있는 공간은 오히려 분란의 공간이기만 하고 둘은 서로 다른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둘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내와 남편은 상처는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깨달음 속에서 그들도 모두 그 상처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자신과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개인적 아픔에 초점을 맞춘 <래빗 홀>과는 다르게 <르 아브르>는 난민 문제라는 사회적 이슈를 들고 나온다. 항구 도시의 이웃들 중에 부자는커녕 중상층도 없어 보인다. 1:99라는 최근의 구호 정도가 아니라 하위 10분위에 속한 듯 보이는 것이 이들이다. 그런데 ‘가난’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할 뿐이다. 그러던 중 난민 아이가 나타나고 이 아이를 경찰의 눈을 피해 영국의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주인공과 그 이웃들이 함께 노력한다. 그런데 이들의 말과 행동은 돈을 초월했기에 오히려 자본주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컨대, 주인공이 아이를 보낼 돈이 필요하게 되자 술집 주인은 ‘요즘 시대에 빵집이나 여는 딸에게 유산 따위는 물려줄 수 없다’는 이유로, 베트남 청년은 ‘딸이 3살 밖에 안됐으니 돈 쓸 일은 없다’ 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돈을 보태려고 하는 장면은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흘리게 되고 왜 내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이 들어 다시 또 자신에게 웃음을 흘리게 된다. 또한 자선 공연을 위한 마을 유명 가수의 섭외는 그저 가수와 아내를 화해시키는 것으로 가능하게 된다. 애초에 이런 영화니 보는 내내 물욕과 출세를 초월한 신선들이 사는 환상의 마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곳이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과 나도 그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 역시 영화 감상 후 짙게 남게 된다. 진짜 사마리아인이 사는 이 마을을 워낙 편안하게 연출했기에, 영화는 자본과 명예에 쫓겨 사는 현대인들을 질책하기 보다는 오히려 위안을 주고 있다.

 <진짜로>는 <래빗 홀>의 현실성과 <르 아브르>의 SF 사이에 위치한다. 아이들이라는 순수함과 현실이라는 잔인함이 묘하게 맞물려 있는 영화로, 한국 제목인 <진짜로>는 어쩌면 <르 아브르>에 더 어울리는 제목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현실에 가장 가까운 어른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다. 영화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듯 현실에 가장 가까운 어른들이란 가운데 위치한 세대다. 즉, 이전 세대라 불리는 어르신과 다음 세대라 불리는 아이들의 가운데에 위치한 세대가 그들이다. 그들은 돈을 벌고 어른을 부양하며 아이들을 키운다. 그렇게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듯 보이는 세대이며 헉헉 거리며 살아가는 세대이지만 막상 모든 문제점은 그들(이후 어른 세대)에게 있다. 오히려 어르신 세대와 아이들 세대는 단편적이지만 서로 교감을 나눈다. 어르신 세대는 아이들 세대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그 상징적 매개체가 빵이다. 이미 실력은 사라져 버린 그래서 현실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빵을 그 손자 형제가 나누어 먹는 장면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이 영화가 <래빗 홀>의 현실과 <르 아브르>의 SF 중간지점에 위치한 이유는 소외와 단절을 겪는 어른 세대는 아이들 세대에게 아픔을 남기지만 오히려 화해를 청하는 세대는 아이들 세대라는 것이다. 헤어지는 동생에게 ‘아빠를 부탁’한다는 형의 말, 밤 새 일하고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는 딸, 쓰레기 치우기, 방청소 등 아이 답지 않게 척척 해내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헤헤 거리는 아이들 세대는 결국 찌질 하게 보이는 아버지에게 ‘미안’이라는 진심어린 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듣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실제 아이들 세대가 영화에서 만큼 성숙한가? 아마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학교 폭력’이라는 문제가 해가 갈수록 잔인해지고 일상화 되고 있는 것은, 아이 세대가 어른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소외와 단절의 유산을 영화에서처럼 거르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아이 세대가 어른 세대에게 화해를 청하는 듯 보이고 오히려 그들을 돌보려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아이 세대가 어른 세대에게 사랑을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반증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보듯이 아이 세대의 기적을 바라는 바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대로 이다. 죽은 강아지가 살아나지 않는 것은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아버지는 파친코를 계속 할 것이고 누군가의 아버지는 아마 가수로서 크게 성장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의 부모는 화해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가수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아니 아마도가 아니고 확실히 지금 세대의 어른들은 직무유기다. 아이들 세대에게 소외와 단절이라는 유산만을 남겨주고 자본과 명예의 꿈만을 꾸게 하는 어른 세대는 분명 나쁘다. 그래서 아이 세대에 미안하다. 그래서 이 영화 끝에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리적 단절만이 영혼의 단절에 영향을 준다고 믿고 싶지 않다. 마르크스가 실패한 사상가인 이유는 본질을 놓쳤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소외의 이유는 물리적인 것에 있지 않다. 물리적 소외는 물리적 욕망에 실패했기 때문이며, 이 물리적인 것으로의 욕망은 빈 곳을 채우기 위함이다. 빈 곳이란 배고픔 따위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영혼의 어느 부분인가가 구멍이 뚫린 채 인간은 태어난다. 이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물리적 만족을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며 집착, 분노 등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즉, 물리적 단절로 인해 영혼의 단절이 일어 난다기 보다는 물리적으로 빈 곳을 채우려는 것에 대한 거절로 영혼이 상처받았을 뿐, 빈 곳은 애초에 있었던 구멍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세 편의 영화에서는 본질적인 영혼의 부분까지는 건들고 있지 않다. 그저 위로할 뿐이고 현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다고 영화 세 편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세 편의 영화 모두 소통의 기본이자 시작인 ‘공감’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위 모두가 소외와 단절을 통한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래빗 홀) 이웃을 돌보며(르 아브르) 세대를 돌봐야 한다(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다. 약한 존재고 쉽게 무너지기 쉬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영화들은 던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1:99에 분노하여 자본 세력에 대한 Occupy운동만을 펼칠 것이 아니다. 소외되고 단절된 내 내면과 어그러진 우리 사회에 분노하여 공동체에 대한 Occupy운동을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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