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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스카이 크롤러

(2010년 10월 28일 작성)

 

스카이 크롤러

The sky crawlers

오시이 마모루, 2008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는 육체를 버리고 정신(고스트)이 광대한 네트로 뛰어들었다면, <스카이 크롤러>의 키르도레1)는 고스트가 없는(듯한) (영원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늙지도 죽지도 않지만 자신에 대한 과거의 기억도 없고 죽음에도 담담할 뿐인 존재. 즉,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만 무한히 반복되는 존재. 키르도레는 서로 같은 처지지만 서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모두가 철저히 혼자가 되는 존재.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 실마리도 잡지 못하는 존재.

 누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고스트가 없는 듯 보이는, 철저히 ctrl+C와 ctrl+V로 대체되는 육체를 누가 이해하고 있는가?

 

부대에 견학 온 관광객들은 키르도레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령관 쿠사나기를 분노하게 한다. 그 눈물은 이해가 아닌 동정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막연한 눈물, 동정. 키르도레는 경마장의 말이나 투견장의 개가 아닌, 엄연히 살아 존재하는 인간이기에 쿠사나기는 관광객들에게 분노했을 것이다.

 오히려 키르도레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외부인은 그들과 살을 섞은 창녀들과 그들의 비행기를 수리하는 정비사들이다. 영원한 ‘아이’인 채로 살아가야하는 키르도레에게 애인이 되어준(애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친구에 가깝게 묘사됐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키르도레에게 엄마(정비사 사사쿠라를 ‘마마’라 부른다)가 되어준 이들은 관광객도, 인권단체도, 정부도, 시민들도 아니었다. 죽음 뒤엔 새로운 기억으로 리셑되는 키르도레들을 보살피고 안아주는 그들(창녀와 정비사)이 있기에 오로지 현재뿐인 키르도레의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살아남는지도 모른다.


출연 분량은 짧지만 '티쳐'라는 존재 또한 키르도레에게 매우 중요하다. 티쳐는 주인공인 쿠사나기와 칸나미가 몸담은 로스톡社의 경쟁회사인 라우테른의 에이스인데, 신기하게도 그는 성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아이인 키르도레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인 것처럼 묘사된다. 키르도레는 티쳐에게 도전하고, 죽고, 정신이 리셑 된 육체로 다시 돌아온다. 창녀와 정비사가 키르도레의 정신을 안정시키는 존재라면, 티쳐는 그 정신을 전진시키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티쳐는 무적의 악(惡)이며 어떤 키르도레는 전선을 이탈해서라도 그와 싸우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이탈’ 이다.

 

쿠사나기는 살아남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남았고 그래서 다른 키르도레보다 기억의 축적이 많다. 그녀는 키르도레(아이)인 채로 딸을 낳았고 언젠가 딸이 자신을 추월하고 진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키르도레다. 동시에 오랜 시간을 살아남으면서, 반복되는 시간과 반복되는 키르도레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결심도 한다.

칸나미는 에이스(라고 한)다.2) 그는 자신의 전임자 진로의 행방을 쫒는다. 그가 누구였으며 어떻게 죽었는지 본능에 가까운 의문을 갖게 된다. 과거에 집착하고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지만 현재의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버리고 정신은 붕괴되려 한다. 그렇지만 쿠사나기와의 죽음에 대한 논쟁으로 그는 미래를 보게 된다. 쿠사나기에게 ‘너는 살아야해’라고 말하며 티쳐를 추격하기 위해 나간다.

 

“항상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서 늘 경치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일까?”

칸나미가 티쳐를 향해 날아가며 읊조린 독백이다.

칸나미는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늘 같지는 않다는 것, 그 것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냐고 쿠사나기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티쳐와의 전투는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에서 칸나미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외에도 짧지만 자신이 쌓은 추억들을 잃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다시 리셑 되어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미 지금의 자신이 아닐 것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라서 이 독백은, 쿠사나기를 혹은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헌신을 나타내는 독백이 아니었을까?

칸나미의 출격은 적이 나타나서도 아니다. 로스톡에서 명령한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 티쳐를 격추시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다.

 

쿠사나기도 칸나미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쿠사나기는 딸을 낳았으며 칸나미는 명령과는 상관없는 비행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로 이룬 ‘일탈’이다. 이 의지의 일탈이 조금씩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이들은 깨달은 듯하다. 공간도 시간도 그리고 자신의 육체도 ctrl+C와 ctrl+V지만, 살아남아서 의지를 가지고 일탈할 때 아주 조금씩 이나마 세상과 시스템이 바뀔 것이라는 것 이라는 믿음의 깨달음.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그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리셑된 칸나미(그렇지만 이름은 바뀌어버린)가 쿠사나기 앞에서 인사를 할 때, 쿠사나기는 칸나미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살아남아 아픈 혁명을 품었을 테다.

  

 출처: 네이버 영화





 

1) 사춘기 소년소녀의 모습으로 더 이상 성장하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2) 본인이 자신의 과거를 모르니, ‘에이스다’라기 보다는 ‘에이스라고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