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6일 작성)
이해 한다는 것
윈터스 본(Winter's Bone, 데브라 그레닉 감독, 2010)
사진출처: 다음 영화
1+1=10. 틀렸을까? 1+1=2가 응당 당연함을 나타내는 대표적 수식이지만, 이것은 10진법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0과 1로 이뤄진 2진법의 세계에선 1+1=10이란 수식 역시 응당 당연함을 나타내는 대표적 수식이 되겠다.
윈터스 본에서 보여 지는 마을 역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2진법 세계다. 집을 담보로 보석으로 풀려난 아버지가 재판을 앞두고 사라지자, 장녀 리 둘리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며 자신이 속해 있는 기이한 2진법 마을에 차차 적응(혹은 순응)해 나가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다.
아마도 영화 시작 전, 리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표면에 드러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든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집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 리는 차차 그 애정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게 된다. 그러면서 리는,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하자, 그러면 집은 잃지 않게 된다, 집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지킬 수 있는 곳이다, 라는 생각으로 애정 뿐 아니라 아버지의 존재도 지우려고 한다. 그럼에도 집을 지킬 수 없자, 이번엔 군대에 입대하고자 한다(입대하면 돈을 받게 된다). 장녀라고 해봤자 10대 후반인 리는 남은 가족들1)을 위해 자신의 미래조차 포기하려 한 것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심사관에게 거부되긴 하지만, 이즈음에서의 리는 이미 아버지의 존재도 자신의 꿈도 저 깊은 곳으로 침전시키고 만다.
리가 살고 있는 마을, 더 정확히는 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친족들에게는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폭력적이며 모두가 비밀스럽다. 영화 후반에 이르기 전에는 주먹다짐 한 번,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지만2) 가슴 졸이며 보게 되는 이유는 하나의 유기체 같은 친족들 때문이다. 마치 마을 전체에 (실제로 물리적으로)무거운 안개가 끈적끈적 가득 차있는 느낌이랄까.
누구보다도 거칠게 묘사되어 친족들로 부터도 ‘미친 놈’ 소리를 듣던 티어드롭(리의 큰아버지, 즉 아버지의 형)은 영화 후반부 위기에 처한 리를 구해준다. 친족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리를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서 그리고 리에게 누가 동생(리의 아버지)을 죽였는지 알려 하지도 말고 알더라도 자신에게 말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티어드롭도 리처럼 많은 것을 포기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더불어 지금도 포기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포기했고 포기해온 사람이 비단 티어드롭 뿐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리의 모든 친족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을 자의든 타의든 포기해가며 공동체를 유지해 온 것이 영화의 친족들이며 그들로 인해 무거운 안개가 마을에 내린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영화의 막바지, 이들이 리에게 한 가지 더- 인간성을 포기하라고 배려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증명해야만 집을 잃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아버지의 시체가 있는 호수로 리를 데려간다. 리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있고 친족 중 누군가가 전기톱으로 아버지의 팔을 자르는 모습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려져서, 이런 것이 이 마을의 ‘일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며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이 잔인한 상황마저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아니다. 오히려 하이라이트는 영화의 에필로그다. 집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보석금의 일부도 받아서 오랜만에 동생들과 마음의 휴식을 갖는 리에게, 첫째 동생은 조금 성장한 듯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둘째 동생은 영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을 보이며 끝나게 되는 엔딩 장면이 영화의 가슴 아픈 하이라이트인 것이다. 많은 것을 포기해서 얻은 잠시의 행복한 장면. 이 엔딩 장면이 가슴 아픈 이유는 아직 마을은 안개로 가득하고 리는 앞으로 더 큰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고 마을에 속해있는 한 동생들도 포기라는 배려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진을 찍듯 끝나는 엔딩 장면은 ‘아직은’ 행복한 칼라사진이지만 머잖아 보는 것마저 아련한 흑백사진처럼 변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10진법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내가 2진법의 리 둘리나 티어드롭을 이해하려고 생각한 이유는 영화가 끝난 후 가슴에 맺힌 답답함 때문이었다. 폐쇄된 공간, 오직 0과 1만 흐르는 그 공간의 사람들을 내가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도 옳고 나도 옳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그저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동정과 이해를 같은 선 위에서 말하고 싶지도 않다. 동정과 달리 이해는 마음과 논리를 함께 긴 시간동안 작용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잘 이해하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간 세월을 면면히 되돌아보니, 나야말로 10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인간임을 인식하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알지 못한 채 말로만 떠들던 그런 사람. 누군가를 쉽게 이해한다고 말하지 말자. 이해란 그 존재가 지나온 길, 그 전체를 애정으로 바라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니까.
사진출처: 다음 영화
2) 후반에도 직접적인 폭력장면은 없다. 그저 리의 얼굴이 폭행당한 후 부어있는 모습만 남아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후반에 전기톱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피’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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