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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히든

(2011년 5월 14일 작성)

 

히든 (미카엘 하네케, 2005)



 첫 장면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고정된 카메라 화면을 한동안 CCTV처럼 보여주는데 그 풍경은 너무나 일상적이다.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카메라는 계속 고정되어 있고 두 사람의 대화만 나온다. ‘이 쯤에서 찍었나?’ 등의 덤덤한 말투로 이어지는 대화와 고정된 도로 풍경은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정도로 과하다. 그러더니 순간 화면이 일그러진다. 그렇다, 두 사람은 집 앞으로 배달된 비디오테이프를 보다가 뒤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 평온하지만 충격적인 첫 장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도되어진 듯 보인다. 첫 번째는 주제의식과 관련 있는데, 현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디오 속 장면이며 이것은 충분히 편집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CCTV처럼 카메라를 고정시켜 촬영한 화면은 어떤 감정이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역할이다.

 실제로 영화는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은 화면과 고정시켜 놓지 않은 화면으로 나뉘는데, 관객들은 이러한 지속적인 편집에 고정시킨 화면은 객관성을 담보하고, 움직이는 화면은 주관성이 개입되었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어쨌거나 첫 장면을 통한 두 가지 의도는 상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를 풀어나가는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

 제목이 히든이라면 감춰진 것을 찾아내는 것은 관객의 역할일진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요 사건인 ‘누가 비디오 테이프와 그림을 보냈는가’가 아니라 ‘영화 속에 감춰진 현실과 왜곡은 무엇인가’이다. 실제로 영화는 범인은 누구인지, 비디오 테이프는 누가 보냈는지 따위는 무시하고 영화를 끝내버린다. 아니 영화 내내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그냥 끝내버리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감독을 봤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감독에게 이 사건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이 영화는 메인 스토리조차도 일종의 소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을 헷갈리게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첫 번째 의도-주제의식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로 변하게 된다. 즉, 감독이 관객을 헷갈리게 하려는 것은 관객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헷갈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화의 주제의식에 다가가게 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에서 기인한 것이다.

 

 배달되는 비디오 테이프는 크게 4단계로 나뉘는데 이는 주인공의 왜곡된 기억을 열어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1단계는 첫 장면과 같은 주인공의 집을 찍은 테이프다. 주인공은 자기 집과 집 앞 도로를 대체 누가 그리고 왜 2시간이나 찍어서 보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비디오 테이프를 보낸 사람이 자신의 팬1)이거나 사춘기 아들의 친구 등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코 자신의 잘못 때문에 누군가 원한을 가졌다고는 생각조차 안하는 것 같다. 아마도 주인공은 스스로를 생각하기에도 사회 중산층을 대표하는 선량한 시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초반에 비춰진 주인공의 모습은 사실상 선량한 사회 중산층을 묘사하고 있다. 안정된 직장과 명성을 얻고 있는 주인공. 아내와는 사이가 좋고, 아내 역시 전문직에 종사한다. 아들은 사춘기이긴 하지만 식사 전 단란한 모습으로 부모님과 키스한다. 또한 아들은 교내 수영부원으로 성적이 꽤 좋은 편으로 암시된다. 그뿐이 아니다. 주인공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함께 먹고 함께 농담하고 함께 웃는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런 테이프를 보냈단 말인가? 이러니 누군가 테이프를 보낸 의도는 자신이 잘못해서 보다는, 자신에 대한 집착이거나 자신을 질투해서 보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2단계는 주인공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을 찍은 테이프다. 이제 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팬이든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든, 자신의 집을 찍는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고향집을 찍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곳에는 두고 온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피를 토하는 사람이나 닭의 목에서 피가 나오는 그림을 테이프와 함께 보낸다. 주인공은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혹은 모른 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은 관객들을 섬뜩하게 한다. 미래를 예고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일까? 하지만 주인공의 과거를 알게 되는 순간 그래서 그 그림이 미래를 예고하며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은 오히려 더 섬뜩해질 수밖에. 

 결국 주인공은 과거를 ‘편집’해 버린 채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선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명예를 움켜진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주인공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편집된 기억의 필름을 붙일수록 그 선량해 보이던 얼굴은 점차 일그러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문제를 타인에게 돌리고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그래서 현실에서 움켜쥐고 있는 그 무엇 하나 놓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일그러진 얼굴은 고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짜증’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처음엔 찌질하게 보이던 주인공은 점차 야비해 지더니만, 궁극에 가서는 괴물처럼 보인다.

 이 2단계 테이프와 그림으로 인해서 주인공은 옛 기억 속 편집된 장면을 떠올린다. ‘짐작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주인공에게 그게 누구냐고 묻는, 어쩌면 당연한 질문을 부인이 던지지만 주인공은 ‘확실하지 않아서’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부인과 말다툼을 하게 된다. 주인공은 왜 당연한 이 질문에 왜 대답하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누구냐’는 당연한 부인의 질문에 대답하게 되면, ‘왜’라는 또 다른 당연한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서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기억을 공유하던 어머니를 찾아 갔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에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게 뭐 큰 일 이었냐.’며 반문한다. 어머니 역시 기억을 편집해 놓은 것인지 아들을 위한 배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머니의 대답은 기억의 왜곡으로 이어지게 된다. 방송 편집은 ‘삭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이 왜곡은, 닭의 머리를 자른 마지드가 칼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린 시절 모습이 꿈으로 발현된다.2)

 

 이런 주인공에게 3단계 테이프는 더욱 직접적으로 기억의 단서를 제공한다(비록 주인공은 단서를 제공받기 원하지 않았겠지만).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1인칭 시점으로) 어느 거리를 지나 어느 건물 속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찍은 테이프가 도착하게 된다. 화면에 찍힌 거리 이름을 찾아 직접 그 집으로 찾아간 주인공은 늙어버린 마지드와 만나게 된다. 그에게 마지드는 편집하여 잘라내 버린 과거인 동시에 기억하기 싫은 치부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원인을 전가하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마지드의 존재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가 된다. 모든 것을 부인하는 마지드에게 협박하듯 말하고는 그대로 집 밖으로 나와 버리는 주인공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다. 충분히 대화를 통해 테이프를 보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냐는 질문은 또한 어쩌면 어리석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테이프를 누가 보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테이프 내용은 그저 자신의 집, 고향 집, 마지드의 집만 찍혀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중요한 것은 마지드라는 존재 자체, 즉 과거를 편집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적 인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도 영화가 끝나도록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열린 결말과는 다른 무관심의 차원이다.

 

 3단계 테이프가 과거의 막연한 공포와 조우하게 했다면, 4단계 테이프는 그 과거가 현실로 이어진 구체적 공포가 된다. 마지드의 집을 찾아갔지만,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부인에게 말한 주인공은, 마지드의 집에서 주인공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찍힌 4단계 테이프를 보고 위기에 처한다. 중산층에 지식인인 주인공은 자신이 쌓아올린 탑이 과거에 의해 무너질까봐 공포에 떨게 된다. 그가 2단계에서 어머니를 찾아 갔듯이, 이제는 부인에게 과거를 털어놓는다.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며 ‘6살짜리가 뭘 알았겠냐, 그 시절엔 다 그렇지 않냐’는 변명을 잊지 않는다. 안타까운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편집장이 자신에게도 테이프가 보내졌다는 말에는 과거를 왜곡하고 마지드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과거 기억의 필름은 아직 편집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때마침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실종신고를 내고 마지드와 그 아들을 경찰에 유력한 용의자로 신고한다.3) 다음 날 아침 아들은 친구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가출이 아닌 무단외박임이 밝혀진다.

 

 여기까지는 고정된 카메라와 그렇지 않은 카메라를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처음에 말했듯,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은 객관적이며 그렇지 않은 카메라의 시선은 그렇지 않음을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첫 장면의 첫 번째 의도다. 즉, 카메라를 고정하고 찍은 것은 테이프 속 화면이며4) 이 화면은 자기장치에 기록된 ‘기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화면을 되감는 장면을 통해, 이 ‘기억’은 편집 가능한 기록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쨌거나 아들의 무단외박 사건이 있은 후, 마지드는 주인공을 자기 집으로 불러내어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단호히 자살한다. 그런데 마지드가 주인공을 불러내기 전 주인공이 하고 있던 일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 화면은 주인공의 TV 프로그램을 비추고 있다. 주인공이 사회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토론을 한다. PD는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앞을 봐 주세요’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토론회가 끝났다. 그리고는 갑자기 화면이 멈춘다. 방금까지 보여준 화면도 화면 속 화면5)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방송국 직원과 함께 그 토론방송을 편집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드에게 전화가 오고, 마지드는 자기 집에서 자살을 하게 된다. 그것도 카메라고 고정된 화면으로 말이다. 이렇게 고정된 화면이 나오면 관객들의 각인된 고정관념이 외친다, ‘이건 진짜 상황이야’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고정된 화면이야말로 주인공이 또다시 기억을 편집하여 자신의 기록장치 속에 집어넣은 것을 (마치 편집된 TV처럼) 보여준 화면은 아니었을까? 마지드의 자살에 충격 받았다는 주인공은, 왜 신고도 안하고 몇 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것일까? 그리고 감독은, 그 사건이 종결되고 주인공이 일터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옷을 모두 벗고 그토록 편안하게 잠드는 장면을 왜 보여준 것일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테이프와 그림을 보낸 사람이 마지드인지, 마지드 아들인지, 주인공의 아들인지 혹은 그 아들의 친구인지, 주인공의 팬인지 아니면 부인인지, 아들에게 엄마의 불륜 상대로 의심받는 주인공의 친구인지, 편집장인지 알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마지드의 자살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편집되어 나온 왜곡된 기억인지 알 수 없다. 왜냐고? 그 모든 것들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른다는 것 그 자체이고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그 모름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임을 수긍하는 것이다.

 

 브로슈어에선 영화 <히든>을 ‘미디어를 본격적으로 그린 작품’6)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딱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미디어보다는 ‘보편적 인간의 삶을 본격적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싶다(미디어도 결국 인간의 삶이 만들어 낸 결과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편집 혹은 왜곡을 심리학 용어에 담아 어렵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많은 인간들이 그리 했으며 그리 하고 있고 그리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인간의 사고와 대화에  완벽한 객관성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성숙한 인간이라면 알 것이다, 내가 지금 나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편집된 기억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주위에 그 기억을 재생산함으로써 자기 삶의 기록에 흠이 없기를 바라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상처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간. 무엇보다 더 많이 배운 자, 더 많이 가진 자 그래서 (영화의 표현대로) 잃을 것이 더 많은 자가 자신이 가진 더 많은 힘으로 타인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삶을 더 많이 편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 한 점은, 이 기록의 편집을 모두가 용인하고 있으며, 자신이 받은 피해는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그것은 완벽함을 요구하는, 실수는 용서받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한히 경쟁하는 사회 시스템에서의 실수는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끊임없이 등수와 결과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물들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시험지를 채점하는데 틀린 문제는 작게 표시하고 맞은 문제는 크게 표시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이 어리석은 사회 시스템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인생은 라이브 방송임에도, 그래서 자신의 기록을 편집하는 장면조차 녹화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누구나 멍청하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모두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사랑하는 드라마(혹은 만화, 혹은 드라마, 혹은 책) 주인공이란, 실수 없는 완벽한 캐릭터가 아니라 모자람을 이겨내는 캐릭터라는 것을7). 그리고 대부분의 악당은 자신의 실수를 덮어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피해를 주는 인간이라는 것도.

 

 


1) 주인공의 직업은 작가이면서, 문학과 관련한 TV 프로그램 사회를 보고 있다. 

 

2) 자신이 마지드에게 닭 머리를 자르라고 시키고선, 마지드가 닭의 머리를 잘라서 자신을 위협했다고 부모님께 말해버리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인공은 꿈에서 과거에 자신이 거짓말한 부분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3) 물론 여기서도 주인공은 타인에게 ‘말’ 함으로써 자신의 기억을 왜곡한다. 진행 상황을 묻는 부인에게 계속 발뺌 하고 있다고 말함(이것은 일종의 공증 혹은 공언의 효과를 가진다)으로써 현실을 또다시 왜곡하려 한다. 

 

4) 어찌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오히려 극장 화면 속 TV 화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듯 보여줌으로써, 영화 속 현실(고정하고 촬영하지 않은 화면)보다 TV 속 화면(고정하고 찍은 화면)이 더 진실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고정관념이 심어지게 된다. 영화를 현실이라고 했을 때, 고정하지 않은 화면은 현실이고 고정한 화면은 테이프 자기에 기록된 ‘기억’일 뿐인데 말이다. 


5) 영화관 화면 속 TV화면. 

 

6) 2011 무비꼴라쥬 기획전_두 번째 ‘거장들의 화양연화’ 브로슈어 


7) 위기 한 번 겪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상황은 영화에서도 책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히어로물에서 조차. 왜냐고?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뻥’에는 그리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