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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바빌론 리뷰

바빌론 (2022, 데이미언 셔젤)



주의: 이 리뷰는 영화 결말 부분에서 시작합니다.

0. 등장인물 소개


1. 매니, 울다

바빌론이란 영화판에서 광기어린 영광을 거머쥐다 허무하게 바스러진 이들을 보면서 매니는 도망칩니다. 매니는 바빌론에서 벗어나 20여년을 살다가 관광하듯 바빌론에 가족과 함께 돌아옵니다.
영화관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매니가 겪었던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매니가 직접 겪은 현실은 눈이 멀도록 밝거나 끈적끈적한 추잡함으로 가득한 어둠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빛과 어둠 사이를 거닐던 잭과 넬리의 끝은 공허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겪은 매니에게 달콤한 로맨스와 웃음을 주는 해피앤딩 <사랑은 비를 타고>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교묘하게 편집된 ‘역사’를 보면서, 매니는 그 속에서 살았던 잭과 넬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2. 매니, 웃다.

영화관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는 매니의 모습과 함께 묘한 장면들이 덧붙여집니다. 이것은 매니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영적인 영역입니다. 이 영적인 부분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려니 영화가 추상화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물감이 물에 섞이며 하나가 되는 마블링으로 표현합니다. 물감에 물이 섞이며 하나가 되는 마블링처럼, 그들- 잭과 넬리의 연기도 그렇게 섞여 하나가 됩니다.
매니는 1952년 <사랑은 비를 타고>를 상영하는 영화관 안에서, <움직이는 말>(1878)부터 <아바타>(2009)까지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울러 하나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이 장면은 마치 매니가 계시를 받는 선지자처럼 묘사되는데, 매니는 ‘그 곳’에서 잭과 넬리 역시 하나가 되어 살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매니의 울음은 곧 웃음으로 바뀌며 영화 <바빌론>은 끝나게 됩니다.



3. 그 곳

제가 ‘그 곳’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곳이란 영화 제목이기도 한 바빌론을 말합니다. 마블링처럼 모든 것이 섞여 하나가 되는 곳,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을 모두 아우르는 곳이 바빌론 입니다. 즉, 바빌론은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장소인 ‘영화판’을 뜻하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유영하는 거대 유기체같은 정신적인 생명체를 뜻합니다.
바빌론에선 개인의 삶은 남지 않습니다. 배우가 현실을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그저 영화만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모여 ‘영화’라는 거대한 예술이 됩니다. 바빌론 안에선 영화라는 이름으로 죽어도 살 것이고 모두가 하나입니다.
마블링과 시대를 뛰어넘는 영화들이 어울려 추상화처럼 변해버린 영화 결말을 설명하기 위해 감독은 미리 평론가 엘리노어의 입을 빌려서 말로 설명합니다.
(엘리노어가 잭에게) “100년이 지나고, 누구든지 당신(잭) 작품을 보게 되면 당신은 다시 부활하는 거야.”

잭이 현실에선 술해 취해 비틀거리지만 카메라 앞에선 끝내주게 멋진 연기를 보여주는 모습이 감독이 말하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바빌론의 정점에 서 있던 잭도 결국 그저 작은 부품일 뿐입니다. 자신이 작은 부품일 수밖에 없음을 슬퍼하는 배우와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당신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해. 영화라는 거대한 바빌론 속에서 당신는 그저 대체 가능한 작은 부품이겠지만, 나는 당신들을 기억하고 싶어. 스타 배우, 매니저, 감독, 카메라맨, 제작자, 음악가, 연주가, (지금은 사라진 무성영화 시절) 자막 제작자, 평론가 그리고 엑스트라까지.”

영화 매니아가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물씬 들면서, 결국은 감독의 의도된 따뜻한 온정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영화 <바빌론>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가지 모두를 영화 종사자들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영화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도 개인적인 삶이 있으며 영원히 영화 속에서 존재할 것이라는 위로의 시선과 함께, 당신들은 결국 작은 부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박제시켜 버립니다.

이 잔인한 사실을 감독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카메라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는 영화관 안 관객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다양한 관객들의 모습 중에서도 간간히 섞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하품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아이들은, 아마도 엄마 아빠의 추억을 더이상 다음 세대는 공유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지나간 부품을 추억하는건 그냥 그 세대 뿐입니다.

바빌론이란 영화판에서 광기어린 영광을 거머쥐다 허무하게 바스러진 이들을 보면서 매니는 도망칩니다. 매니는 바빌론에서 벗어나 20여년을 살다가 관광하듯 바빌론에 가족과 함께 돌아옵니다. 아빠 매니의 청춘과 꿈으로 가득했던 그 곳 앞에서 매니의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지루해요.”  

딸아, 여기는 참 지루했단다

사진 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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