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스테판 오비에 / 벵자맹 레네 / 뱅상 파타 감독
2012년
출처: DAUM 영화
사회 부적응자의 노래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
풍경 하나.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이가 땡깡을 부리자 엄마가 아이에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너 자꾸 그러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 엄마가 가리킨 손가락 너머에는 몇 몇 노숙인이 모여 있었습니다.
풍경 둘.
아이가 8개월 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조금 예민해 보이긴 했어도 초등학교 때는 잘 지냈었는데, 중학교를 진학하고 2학기 부터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아이를 히키코모리(우리말 은둔형 외톨이)라 부릅니다. 주위 부모들은 쉬쉬하면서도 집안에서는 자기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저러지마”
노숙인은 광장에서 살고 은둔형 외톨이는 방 안에서만 삽니다. 하지만 둘 다 ‘사회 부적응자’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어요. 이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게을러서? 정신력이 약해서?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엔 교사로서 너무 무책임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이 영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에서 펼쳐집니다. 어네스트(곰)는 노숙인으로 살고있고, 셀레스틴(쥐)은 외톨이 입니다.
그리고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을 통해서 무엇이 사회 부적응자를 만드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개인의 잘못 보다는 그 주변 환경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이 사회 부적응자를 만드는가? : 어네스트의 경우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이 둘을 무엇이 사회부적응자로 만들었을까요?
출처: DAUM 영화
어네스트의 경우는 ‘돈’ 입니다.
원 맨 밴드로 광장에서 지내는 어네스트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루 먹을 음식을 걱정하며 살고 있는 어네스트를 보면서, '그럴거면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잖아' 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가난이 어네스트의 잘못 뿐일까요?
그 실마리는 어네스트가 아닌 셀레스틴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셀레스틴은 재판석에서 상당히 뼈 있는 말을 던지죠.
“부자인 사람들은 점점 뚱뚱해져만 가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만 가고 있어요.”
영화 속에서 중산층을 대변하는 곰 가정(조루즈 씨 가정)을 통해 영화는 더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집니다. 아내는 치과를 경영하고 남편은 사탕가게를 경영하는데 이들 곰 부부가 식탁에서 자기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죠.
“넌 두 배로 부자가 될 거야.”
전형적인 부의 세습입니다. 아이 곰은 영화 속에서 천덕꾸러기처럼 나오지만, 이 아이는 아마도 미래에 부모보다 더 큰 부자가 될 것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만은 없습니다.
1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도 계속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빚은 늘어만 갑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CEO와 일반 직장인의 연봉 차이가 100배 이상 나기도 하는 기업이 있습니다. 과연 CEO는 이 직원보다 100배 더 열심히 일했을까요? 어네스트가 곰 부부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지금처럼 가난하게 살까요?
어네스트를 변호하는 셀레스틴. (출처: DAUM 영화)
무엇이 사회 부적응자를 만드는가? : 셀레스틴의 경우
출처: DAUM 영화
셀레스틴은 ‘획일적 사고’로 인해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곰은 무서운 동물이라는 교사의 가르침을 셀레스틴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셀레스틴은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근거있는 가르침일까? 직접 겪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지?
곰은 위에, 쥐는 아래에 살아야 한다는 것도 셀레스틴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쥐)는 왜 위에서 살지 못하지? 왜 다들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셀레스틴은 단순히 불평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의 추론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획일적이고 단단한 사회 체제 앞에서 셀레스틴의 합리적 질문은 합리적 대답대신 야유와 비난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선생님은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30년이 넘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 선진국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그 ‘문턱’의 의미가 경제적 의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경제적 문턱이 아니라 정신적 문턱이었던 것입니다.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해 다른 생각 자체를 배제하는 사회가 선진국 문턱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리고 여전히 우리나라는 합리적 질문을 싫어합니다. 따진다고 핀잔줍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조심하라고 충고해줍니다.
또 여전히 우리나라는 다름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다르지 않은 '자기 편'을 끌어 모으려고도 노력합니다. 그래서 같은 학교, 같은 고향, 같은 성(sex), 같은 성(family name) 등으로 무리를 짓고 줄을 세웁니다. 일부 대학생들이 출신 고등학교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닌다는 뉴스도 들려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마라. 그냥 믿어라. (출처: DAUM 영화)
다시,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으로
공정하지 못한 부의 분배. 그리고 획일적 사고의 강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서로 다른 이유기는 하지만 각각 사회 부적응자에서 범죄자가 되어 자기 사회에서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교실 안에서도 아이들 사이에서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이상한 아이' 또는 '관종'(관심종자)라고 부르죠. 고학년이 될수록 그 '찍힘'의 정도는 심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임대 아파트' 아이들을 따돌리는 주변 아파트 부모와 그 자식들에 대한 뉴스가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대기업 회장이 하는 갑질에는 분노하면서 자기가 하는 갑질에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이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결국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산골짜기에서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결말이 제게는 마냥 행복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네스트가 켜는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과 셀레스틴의 그림은 그저 사회 부적응자의 노래로 슬프게 다가올 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 노래에 화답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에게 ‘사회 부적응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이상 개인의 잘못이라며 손가락질하고 혀만 찰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사회 부적응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노래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너희들, 만족하니? 미안해. (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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