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카이 크롤러
스카이 크롤러 (2008, 오시이 마모루)
상상 리뷰
쿠사나기의 대모험
1. 모험의 시작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1995)에서 쿠사나기는 네트워크로 들어가 버린다. "자, 어디로 갈까? 네트워크는 광대해."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 쿠사나기.
넓고 넓은 네트워크를 여행하다가 쿠사나기는 어느 온라인 게임을 발견한다. 쿠사나기는 "역시 힘들고 지칠 땐 게임을 하면서 쉬어야지."라는 마음으로 게임에 접속한다.
게임의 이름은 <온라인 스카이 크롤러>. 전투기 파일럿이 되어서 상대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게임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
게임에 접속한 쿠사나기.
2. 잠깐! 온라인 게임 <온라인 스카이 크롤러>란?
<온라인 스카이 크롤러>(이하 <스카이 크롤러>)는 특이하게도 '하드코어 난이도' 1만 존재한다. 또 한 번 생성됐던 캐릭터 이름은 게임 서버에 저장되기 때문에 같은 이름으로 캐릭터를 생성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캐릭터 이름을 '진로'로 짓고 게임하다가 죽으면 '진로'라는 이름을 다시는 만들 수 없다. '칸나미' 등 다른 이름으로 캐릭터를 생성해야 한다.
또 게임 전체 시나리오가 실시간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보통 게임은 캐릭터를 생성하고 게임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진행하지만 이 게임은 다르다. 마치 역사가 흘러가듯 시나리오가 진행되기 때문에 접속을 하지 않는 날이라도 게임은 흘러간다.
죽었다고 시간이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세이브 포인트도 없다.
사실 쿠사나기도 처음엔 이런 게임인 줄 알았다.
다른 특징은 '신문 시스템'이다. <스카이 크롤러>를 운영하는 업체는 시나리오에 대한 사항을 홈페이지에 공지하지 않는다. 게임 안에서 직접 신문을 읽어야만 그 날의 이벤트나 앞으로의 시나리오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게임에 접속한 사람은 그냥 요약된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길 권장한다. 일간지(日刊紙)기 때문에 그 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1면은 읽어두자. 꼼꼼하게 읽으면 예상하지 못한 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이 있다. 전투만 하다가는 스트레스가 너무 높아져서 캐릭터가 자살해 버리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 먹기, 담배 피기, 친구와 대화하기, 연애하기, 애완 동물 기르기 등 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동물에게 주는 애정도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
3. 분노하는 쿠사나기
이런 시스템의 게임 속에서 스트레스 풀러 온 쿠사나기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 분노한 쿠사나기는 전력을 다해 게임에 임했고 쿠사나기의 압도적인 무력(게임 실력)에 게임 밸런스마저 붕괴될 지경이었다. 마침내 쿠사나기가 소속된 로스톡이 상대편인 라우테른의 본진 앞까지 전진하였다. 이 때 <스카이 크롤러>의 제작사는 자신들의 캐치프레이즈인 '현실성'을 포기하고 '티처'라는 존재를 라우테른에 배치한다. '티처'는 게임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설정된다. 처음에는 유저들이 많은 항의를 했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티처' 때문에 게임이 쫄깃 쫄깃 해진다는 평이 많아지면서 불만은 잠재워진다.
쿠사나기는 티처와 한 판 붙어보고 싶었지만 본능적으로 이길 수 없을을 깨닫고 포기한다. 그리고 파일럿을 하지 않고 본부에서 지루한 생활을 계속한다. 애초에 비행 전투 게임인데 비행 전투를 안 하다니 지루할 수밖에. 음. 꼴초가 된 건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경도 썼지.
4. 결심하는 쿠사나기
이 지루한 생활 속에서 쿠사나기는 게임 캐릭터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모습도 같고 고스트도 같은데 이름이 달라진 채 죽고 부활하고를 반복하는 게임 캐릭터들은 얼마나 참혹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착취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그래서 분노라는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쿠사나기를 더 슬프게 했다.
그래서 쿠사나기는 '혁명'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티처'라는 무지막지한 존재를 이겨낼 수는 없다. 혹 '티처'를 이기더라도 <스카이 크롤러> 제작사는 더 막강한 시스템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0과 1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이 어찌 제작사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마치 2차원의 존재와 3차원의 존재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쿠사나기는 고민 끝에 길고 긴 싸움을 준비한다. 게임 캐릭터들의 무의식 속에 진실을 심어주는 방법인데 시간은 매우 오래걸리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캐릭터들에게 진실을 직접적으로 알려줄 수는 없었다. '시스템'이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조금씩 캐릭터의 무의식에 침투해 나가서 그들 스스로 각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잘 짜여진 시스템에서 각성을 한다는 건 버그가 된다는 것.
기억조차 리셋되는 캐릭터들에게 조금씩이나마 진실을 찾아가게 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는 '도화선'이 필요했다. 그 도화선으로 쿠사나기는 '임신과 출산'을 선택했다.
제작사가 '현실성'을 강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임신과 출산'은 놀라운 일이었고 마치 어둠 속 촛불처럼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억이 리셋된 캐릭터조차 쿠사나기의 '일탈'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놀라운 '일탈'은 캐릭터들의 무의식 속에 강력하게 각인되었고 이것은 기시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기시감이 캐릭터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실을 더 빨리 알아채는데 도움을 주었다. 쿠사나기는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예전의 기억(리셋 이전의 기억)'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어찌보면 '플래닛' 헐크와 '스카이 크롤러' 쿠사나기는 닮은 점이 있다.
영화 <플래닛 헐크>가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토르>에선 헐크가 바보로 나와 ㅠㅜ).
5.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쿠사나기의 '일탈'은 누군가의 새로운 일탈로 이어졌다. 이는 쿠사나기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칸나미는 무적의 존재인 '티처'와 싸우기 위해 다가갔다. 티처와 만나면 죽는다는 게 게임 규칙으로 굳어져 버린 상황에서 굳이 그 존재와 싸우기 위해 나가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건 캐릭터의 일탈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쿠사나기 부대에는 다른 캐릭터보다 더 오래 사는 캐릭터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영향일지 몰라도 NPC인 정비사도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하지만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에 대항하는 일탈이.
쿠사나기는 그들에게 일탈을 꿈꾸게 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덧붙이기: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GV 이야기(2017년 11월 26일)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GV로 <스카이 크롤러>를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작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노센스>(2004)지만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스카이 크롤러> 입니다). 이미 <스카이 크롤러>의 리뷰를 2010년에 쓰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별도로 감독은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제작했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 GV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사실 GV가 처음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의 설렘도 있었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이었습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다른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여기에 대한 책임은 사회자가 80%는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옆에 앉은 연상호 감독이 사회를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여하튼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말하는 <스카이 크롤러>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1. 어른 속에 존재하는 아이를 주제로 삼았다.
2. 이 영화에서 전투기 전투 장면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감독판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흥행이 저조해서 무산됨, 기회가 된다면 지금도 편집하고 싶다).
3. 도입부와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활주로의 의미를 생각해달라.
4. 텅 빈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넓은 하늘, 긴 활주로. 시간만 천천히 흘러가는 영화를 지향했다. 반복된 시간을 살아가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이드르이 이야기, 죽음과 삶 사이의 공간. 격렬한 감정이 분출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 뿐이다(내 생각엔 쿠사나기가 관광객에게 화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 한 번 죽으면 캐릭터가 완전히 사라지는 난이도. 보통은 죽더라도 세이브 포인트에서 다시 시작하거나 경험치가 깎이는 등의 패널티를 입고 살아나는데 '하드코어 난이도'는 그냥 끝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