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의 과학, 연결의 욕망
연결의 과학, 연결의 욕망
과학으로 개인의 편리함 혹은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던 인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학의 힘을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세계 구축에 쏟고 있다. ‘정보조직’ 역시 많은 사례의 하나로 어쩌면 인간의 욕망을 기술(IT)과 접목하여 가장 솔직하게(혹은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정보조직과 IT가 인간의 욕망과 함께 어떻게 발전되어 왔으며 그 미래는 어떠할지 예측해 보고 과연 그 미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줄 수 있을지도 언급해보고자 한다.
초창기 정보조직은 분할된 채로 진행됐으며 소수 혹은 (국가나 지배계층 등)조직의 이익을 위한 지식의 보존, 습득을 위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근대화 이 후 지식계층이 확대되면서 응축되어 있던 ‘앎’에 대한 욕구 또한 점차 넓게 분출되어 나갔다. 컴퓨터라는 기계의 등장 역시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행위에 대한 의의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해주는 인터넷이란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인간의 ‘또 다른 욕구’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한 검색 활동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간의 수만큼이나 지식의 수도 많기에 그 많은 지식을 ‘볼’ 수는 있어도 정작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지식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즈음 ‘정보조직’은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 수억의 정보를 조직해서 검색한 상대에게 적절한 정보를 보여주는 것이 그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 강력한 여과장치로 인해서 수억의 정보를 열어볼 수 있는 인류는 오히려 검색엔진이 보여주고자 하는 정보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아이러니를 발생하게 된다. 바로 사고(思考)의 획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객관적 지식이라 일컬어지는 이 정보들의 집합이 과연 나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일까? 객관적이라는 것이 정말 객관적이기는 할까? <1984> 등에서 이미 정보 통제의 디스토피아를 간접 경험한 인류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 막연한 불안함을 인식한 인류는 소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인류가 가진 감정은 아마도 불안 보다는 불만에 가까웠을 것이다. 내가 찾고 싶은 정보는 이게 아닌데… 하는 현실적 불만. 여기서 ‘찾고 싶은’ 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단어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주관성을 토대로, 온라인 세계는 빠른 속도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미 오프라인(현실) 세계에서 경험한 이 패러다임의 변화는 온라인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자신만의 개성을 외치고 있었으며 단지 기술적 문제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에 정보조직은 객관성이 담보된 정보조직에서 개개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주관적 정보조직으로 그 궤를 바꾸게 된다.
이렇게 온라인 세계가 형성되자 인류에게 다른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단순히 정보를 열람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보를 생산하고 싶어 하는 욕구다. 이 욕구로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심지어 온라인 세계에서 개인이 정보를 조직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Blog, Cafe 등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집(house)에서는 정보라는 인테리어를 자신의 취향에 맞게 조직한다. 그 방법도 초기 글(text)의 형태에서 시작해서 음악, 사진, 영상 등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하고 내용과 조직이 잘 된 집은 지식의 객관적 지표로 인정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창조의 욕구가 위에서 말한 ‘또 다른 욕구’는 아니다. 진짜 ‘또 다른 욕구’는 따로 있다. 창조의 욕구보다 더 본질적인 욕구. 바로 ‘공유의 욕구’다. 내가 만들어 낸 창조물을 다른 사람에고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그것이다. 즉 공유의 욕구는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존재함을 느끼고자 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생물학적 욕구인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명제를 선언했지만 인간은 굉장히 결여된 존재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읽히지 않는 책은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자기 존재가 타인에게 열람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고독이라는 깊고도 절망적인 병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일까, ‘무플이 악플보다 무섭다’는 말이 왠지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또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술은 ‘정보조직’을 성장시키게 된다. 그 첫 단계가 온톨로지(ontology)를 이용한 시멘틱웹(Semantic Web) 계발이다. 아직도 성장 중인 시멘틱웹은 프로그램이 모아놓은 정보를 인간이 본다는 점에서는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프로그램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정보를 관계 맺어 모아놓음으로써 인간이 찾고자 하는 정보(유의미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찾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의미한 정보를 검색한 개인은 자신에게 맞게 새로운 유의미한 정보를 창조할 것이고, 위에서 살펴본 인간의 욕망처럼 공유하기 원할 것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이 짧은 기간 급속히 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재의 시멘틱웹도 SNS도 무엇인가 부족하다. 시멘틱웹은 공유의 개념이 부족하며 SNS는 불특정다수의 개념이 부족하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멘틱웹은 불특정다수가 제공한 유의미한 정보를 볼 수는 있지만 자신이 창조한 유의미한 정보를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관계 형성의 피드백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SNS는 유명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유의미한 정보를 보여줄 사람이 너무 적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멘틱웹이든 SNS든 아니면 새로운 무엇이든 이 두 가지가 절충된 방향으로 IT는 발전할 것이다.
발전된 시멘틱웹의 이성과 SNS의 감성을 충족시키는, 그래서 정보의 교류가 프로그램-인간에서 마침내 인간-(프로그램)-인간으로 완성되는 날이 온다면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 인류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그러면 인류가 안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치유되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타락이후 신과의 연결점- 공유를 잃은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끊어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정보조직과 IT를 융합하는 등 자신의 정체감(Identity)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온전하게 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는 신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노력 또한 어그러진 욕망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가족, 친구 등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멀리 있는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먼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을 나누어 준다면 굳이 시멘틱웹이니 SNS가 없어도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지금도 지하철에 앉아서 작은 단말기로 SNS에 열중하고 있을 때, 몸 가누기 힘든 누군가가 그 앞에서 망연히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게 앉아 있는 당신은 행복한가?
참고: 이 글은 성균관대학교 사서교육원 조명대 교수의 <데이터베이스> 수업(2011년 9월 6일)을 듣고 작성한 글입니다.